늙는다는 것이 실감 나는 것은 생경하지만, 즉각적인 순응으로 자연스럽게 따라 인정하게 되는 경이로운 경험이 쌓여가는 과정이다. 겉모습이 변해가는 것을 알게 모르게 적응해왔지만 순간순간 거울 속의 존재가 낯선 타인으로 느껴질 때의 낭패감, 혹은 처연함으로 다가오는 쓸쓸함이 뒤섞여 묵직한 질감의 수용과 함께 회색의 침묵의 짙어진다.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며 움직임이 장애를 받는 상황이 되면 단단한 땅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체념으로 기운이 빠져나간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시점에 차라리 적막의 벌판에 홀로 서있는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산책길 중간에서 방전된 기운에 주저앉을 때 문득 客死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이웃에 중증 치매인 모친을 모시느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봄에 몰두하는 이가 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가 인정하는 자리를 잡았으나, 효도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삶을 유보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함께 사그라드는 중이다.
과거 대가족 시대의 복작거리는 자식들의 자연스러운 품앗이 봉양하던 시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현상이 주변에 자주 눈에 띈다. 외동자식이거나 자식이 없는 경우의 노년은 주변을 곤혹스러운 지옥으로 만드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필자 역시 스스로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해 질 무렵이면 치매노인의 단말마적 비명이 새어 나오는 것은 아마도 억제대? 사용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면서, 어쩌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상념에 빠진다.
한국골든에이지포럼에서 '사전치매요양의향서'를 만들어 오랜 기간 동안 그 필요성을 강조해 왔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무자녀 혹은 외둥이 늘어나면서 간병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간병 살인이라는 해괴한 사건이 늘어나는 등의 수상한 시절에 '사전치매요양의향서'는 어쩌면 자식들의 숨통을 열어주는 묘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생활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늙고 병든 부모의 뒷바라지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자식들에게 윤리와 도덕으로, 효도라는 족쇄를 채워 돌봄을 강요하는 것보다, 전문적 돌봄 기관으로 보낼 것을 문서로 남겨 자식들의 심리적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면, 이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배려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연관된 많은 의미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고 존재의 상호작용과 관계에서의 가치와 의미를 인식해야 한다. 치매뿐만이 아닌 그 존재의 노쇠와 질병으로 인한 주변의 부담으로 야기되는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며 냉철한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존재로 인한 희생과 고통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존재 사과라는 철학적 통찰이 필요한 노년을 인식하게 된다. 만일 내가 감당할 수없이 병이 깊어지면 전문 기관으로 보내기를 바라는 사전의향서의 작성은 결국 내려놓음의 배려이며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다. 죽음이 길어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짧은 죽음을 바라는, 아니 긴 죽음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지막 바램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글: 마음건강연구소 변성식 소장]
#사전치매요양의향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