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좀처럼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조금만 빈틈이 생기면 그냥 쉬지 못하고 또 뭔가를 하려 한다죠. 헬스클럽에 가면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영화를 보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책을 읽는 ‘멀티태스킹 족’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예전엔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이나 신문을 꺼내 읽었지만 지금은 모두들 스마트폰을 봅니다. 차이가 뭘까요? 미디어가 모바일로 바뀌면서 눈과 귀의 호흡이 엄청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제 길고 딱딱한 글은 읽히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기엔 너무나 많은 채널과 콘텐츠들이 존재하니까 조금만 지루하거나 어려우면 독자들은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하상욱이나 최대호처럼 짧고 쉬운 ‘인스턴트 시’를 쓰는 이들이 인기를 얻기도 합니다. SNS에 글을 쓰는 사람들도 구구절절 길게 쓰는 것보다는 짧고 강력한 글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요.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는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쓰고 나서 출판사 편집장에게 보냈다는 물음표 하나로 이루어진 편지입니다. 답장도 느낌표 하나만 찍어서 보냈고요. 그러나 이건 너무 짧아서 거의 해프닝에 가깝고, 제게 짧은 글의 예를 들어보라고 하면 헤밍웨이의 일화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헤밍웨이의 지인 중 누군가가 10 개 미만의 단어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기만 한다면 거액을 낼 용의가 있다는 제안을 한 것이죠. 헤밍웨이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 뒤 단 여섯 개의 단어만 사용해 그 어려운 일을 해냅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한 번도 신지 않았음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 탄생했습니다. 그냥 짧기만 한 게 아니라 엄청난 슬픔과 미스터리가 숨어 있는 한 줄짜리 소설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 소설의 재치에 놀라면서도 헤밍웨이 정도 되니까 이런 글쯤은 단숨에 썼을 거야, 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광고회사를 다니며 이십여 년 넘게 카피라이터로 일했으므로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짧고 쉬운 글을 써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광고 카피는 글이라기보다는 말이나 멘트에 가깝죠. 그래서 같은 글이라도 내용을 압축하고 의도를 명쾌하게 드러내서 전달하는 훈련이 어느 정도는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맹세 컨데 단 한 번도 쉽게 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건 제가 천재가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원래 짧게 써야 할수록 생각은 오래 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헤밍웨이도 몇날 며칠을 골방에 틀어박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런 멋진 글을 써냈을 겁니다. 얼마 전 예전 팀에서 같이 일하던 후배 카피라이터를 만났더니 요즘은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를 뽑을 때 ‘당신이 썼던 댓글 중 베스트 댓글로 등극한 게 있느냐’ 같은 걸 묻기도 한다는군요. 짧으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서 긴 여운을 남기는 글이 요구되는 직업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비단 카피라이터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닙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디지털 시대엔 모두가 글쓰기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기소개서나 보고서뿐 아니라 SNS에 쓰는 글 몇 줄에서도 그 사람의 인격과 취향과 지식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편지를 길게 쓰네.”라고 했다지요. 그만큼 짧은 글을 쓰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계속)
(글 : 편성준) 1993년부터 MBC애드컴, 대홍기획, TBWA/Korea등을 거치며 카피라이터로 활동하였다. 대한항공, 아시아자동차, BC카드, 롯데제과, 한투, SK텔레콤, SK건설, 윤선생 등 다양한 광고 캠페인을 만들어 왔으며, 최근엔 공익광고 「발달장애인-주인공은 싫습니다」 편을 기획했다. 블랙박스 아이나비 커넥티드의 ‘내 차가 충격 받으면 나에게도 충격이 온다’라는 카피와 커피 브랜드 <커피에 반하다>의 ‘커피가 착해서 커피에 반하다’라는 브랜드 슬로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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