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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인

[시가 있는 비즈니스] '카피라이터'의 기다림

편성준,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그가 온다' / '글은 짧게 여운은 길게'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거래처 사람이 갑질을 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다 보니 그런다 하지만 직장 안에서도 같은 편끼리 의견이 갈려 갈등을 빚을 때는 정말 왜 이러고 사나 싶습니다. 저는 광고회사를 오래 다녔는데 일의 특성상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괴로워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촉박한 일정, 내 아이디어에 대한 무반응, 의도한 대로 나오지 않는 결과물들, 두렵고 짜증나는 내부 리뷰에 이르기까지 회사를 다니면서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건 최고경영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큰 광고대행사인 덴쯔의 사장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며 광고주가 되겠다”라고 했다니까요.당시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긍정적인 결과를 빚은 일도 많습니다. 가왕 조용필은 락 기타리스트였지만 가수 데뷔곡은 트로트인 『돌아와요 부산항에』였습니다. 그것도 보컬리스트가 공석이 되는 바람에 임시로 무대에 올랐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라디오헤드는 음악성은 좋은데 곡들이 너무 전위적이란 평을 많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녹음실에서 또 그런 소리를 들었던 그룹의 리더 톰 요크는 “그래? 그럼 아주 대중적인 걸 하나 써주지.”라고 하며 단 오 분만에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곡이 라디오헤드라는 그룹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 ‘Creep’이었습니다. 시인 황지우는 쉽고 달달한 시만 찾는 독자들을 경멸하는 마음으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를 휘리릭 써놓고는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독자들이 너를 ‘자유’나 ‘민주주의’로 해석해 주는 바람에 이제는 그의 대표시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 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회사에서 경쟁PT가 있어서 열심히 준비를 했는데 과정도 힘들었지만 결과도 썩 좋지 못해 안 좋은 소리를 들어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비난과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을 글로 써서 털어내 버리고 싶었죠. 그러나 아무리 쓰고 또 써 봐도 징징대는 푸념 이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늦은 퇴근길에 4호선으로 갈아타고 나니 스피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역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순간 생각했습니다. 이 역 이름은 왜 이렇게 긴 걸까? 역 이름을 지을 때 그 누구도 이렇게 긴 이름으로 짓고 싶지는 않았겠지. 세상에 참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법인가 보다.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그 생각들을 에버노트에 메모했습니다. 제목은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라고 붙였습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이 역 이름을 처음 지을 때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정말 누군가는 한 글자라도 줄이고 싶었을 텐데. 그러나 뭐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우선 ‘동대문’을 뺄 순 없었을 것이다. 동대문은 그 지역의 여러 가게와 거리를 거느리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니까. 그렇다고 ‘역사’를 뺄 수 있었을까. 그냥 동대문공원이라고 하고 싶어도 ‘역사’와 ‘문화’ 중 하나를 빼서 관계자들에게 욕을 먹을 생각을 하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라는 긴 이름을 눈물을 머금고 결정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했던 일의 결과처럼. 집으로 가야겠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서.


짧지만 여운이 길었던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좋아해 준 글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스마트폰을 꺼내 그 생각을 메모해 놓지 않았더라면 위의 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길을 걷거나 샤워를 하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메모를 해놓아야 합니다. 저는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자주 이용합니다. 당장은 어순이 안 맞고 말이 안 되더라도 녹음을 해 놓아야 합니다. 탄탄한 문장으로 고치고 글을 줄이는 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요. 소설가 필립 로스는 ‘아마추어는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만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 하러 나간다’라고 쿨하게 말했지만 그건 대가들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여운이 긴 글을 쓰고 싶다면 그때그때 떠오르는 짧은 생각들을 날려버리지 말고 메모 하십시오. 근데 영감은 언제 오냐구요?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그가 알아서 옵니다.

(글 : 편성준)   [출처 : 북이오 프리즘 ]
 

편성준 1993년부터 MBC애드컴, 대홍기획, TBWA/Korea등을 거치며 카피라이터로 활동하였다. 대한항공, 아시아자동차, BC카드, 롯데제과, 한투, SK텔레콤, SK건설, 윤선생 등 다양한 광고 캠페인을 만들어 왔으며, 최근엔 공익광고 「발달장애인-주인공은 싫습니다」 편을 기획했다. 블랙박스 아이나비 커넥티드의 ‘내 차가 충격 받으면 나에게도 충격이 온다’라는 카피와 커피 브랜드 <커피에 반하다>의 ‘커피가 착해서 커피에 반하다’라는 브랜드 슬로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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