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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칼럼

장례문화비평 <장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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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뱃속에 있는 쌍둥이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한다.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그 말에 오빠가 강력히 반대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여긴 어두워도 따뜻하지. 또 우리를 먹여 주고 살려주는 탯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딴 일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해 줄게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났다.

“엄마라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도 그렇고 어떤 놈이 그런 생각을 자꾸 불어넣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왜 늘 여기 너머를 바라는 거야?

여기도 알고 보면 나쁘지 않아.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만 만족하도록 해.”

여동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음… 내 생각엔 이 꽉 조이는 게 다른 곳,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 엄마 얼굴을 보게 될 곳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표시인 것 같아. 오빠는 흥분 되지 않아?”

 

헨리 나우웬의 죽음에 대한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출생과 죽음을 출산과정과 임종으로 대비시킨다. 자궁(움, womb)과 무덤(툼, tomb)이 ‘w’와 ‘t’의 한 자 차이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실감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물론 가상의 대화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끄트머리’다. 영어의 ‘die(죽었다), expire(숨을 거두었다), lose life(생명을 잃었다) 또는 pass away(지나갔다)’라는 표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끝에서의 머리, 새로운 시작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죽음이란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고통’스럽지만 ‘복’ 있는 관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 한 토막이 그토록 어려운 죽음의 문제를 수월하게 풀어준다. 고차원의 방정식을 한 순간에 풀어낸 듯 통쾌하다. 그 여운은 깊고 길다.

 

성경은 온통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창조와 출애굽의 이야기가 있다. 어린이들이 손에 땀을 쥐며 듣는 다니엘 사자굴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기드온 삼백 용사의 스펙터클 전쟁 이야기도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장터에서 장례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도 있다.

 

창세기에는 족장들의 장례 이야기가 연작으로 펼쳐진다. 시시콜콜해 보이는 묘지 이야기에서 유언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야곱의 유언은 사전 장례의향서의 원조다. 출애굽기는 요셉의 길고 긴 장례행렬이다. 200만의 조객들, 40년간의 행진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광대하고 장엄한 장례식은 없었다. 국장(國葬)도 등장한다. 아브넬의 죽음으로 국론이 분열된다. 다윗은 사면초가다. 직접 장례를 집전한다. 왕의 추모사가 있다. 백성들은 왕의 진정성을 읽어낸다. 다윗 왕권이 견고해지는 순간이다. 그 뿌리가 예수탄생의 모태가 된다.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이야기는 ‘영광’이라는 가장 고결하고 거룩한 단어로 채색된다. 슬픔이 기쁨 넘치는 환희의 현장으로 전환된다. 극적인 반전이다.

 

심리학자 칼 융의 이론대로라면 이야기의 ‘원형’이다. 아키타입(archetype)이라 불린다. 이와 달리 프로타입(protype)이 있다. 원형의 이야기가 내 속에 스며들고 적용된 것을 이른다. ‘변형된 이야기’다. 이제는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장례식은 프로타입의 완결편이다.

 

장례식장은 이야기 방앗간이다. 인간미 넘치는 에피소드가 있다. 삶의 명대사가 가슴 저미게 한다. 흉허물 없이 나누는 인생사가 미소 짓게 한다. 숨겨진 선행에 감탄하고 실패한 이야기에 한숨짓게 된다. 인간사 희노애락이 버무러져 인절미가 되고 송편이 되어 내 영혼을 살찌운다.

 

 

인간은 등에 자신의 이야기를 지고 나온다는 말이 있다. 장례식장은 왜 찾아 가는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 부조금 품앗이를 위해서? 진짜 이유는 그가 세상에 지고 와 풀어헤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인간 심성이 드러난 것이 신문의 오비튜어리(obituary-사망기사)다. 그 날 신문은 예외없이 판매고가 는다. 정설이다. 추모사를 뒤져 읽고 또 읽는다.

 

이어령 교수는 말한다. “산다는 게 뭔가. 내 이야기를 하나 보태고 가는 것 아닌가.” 그렇다. 사자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야기를 남긴다. 장례식이 아무리 화려해도 이야기가 없으면 맹탕이 된다.

 

나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사진설명: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 16세기 작품. 요셉과 니고데모,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옮기고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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